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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Soon-Ja)




  화문석의 역사 제작용구 제작과정 화문석의 종류


초고는 풀과 짚을 뜻하는데 즉 풀과 짚을 이용하여 공예품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초고장이라 한다. 초고는 일명 꽃돗자리 라고도 한다.
우리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공예를 육공(六工)으로 나눈다. 육공이란 여섯가지 공예를 말하는데,
금(金: 금속으로 만드는 모든 공예품), 목(木: 나무로 만드는 모든공예품), 토(土: 흙으로 만드는 모든 공예품), 석(石:돌로 만든 모든 공예품), 초(草: 풀 종류로 만드는 모든 공예품), 수(獸: 가죽으로 만드는 모든 공예품)등이다.
화문석은 바로 초공예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고대 전통 공예미술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중추 역할을 하여 왔다.


이와같이 화문석 돗자리 방석은 예로부터 좌식문화인 우리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승 발전되어온 우리나라 민속 공예품으로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 즐겨 애용하였다. 특히 손님을 맞이할때 손님에 대한 예우로서 화문석을 깔았고 혼례를 치른 신부의 신행짐 속에 반드시 챙겨 놓었던 필수품이었다. 또한 화문석은 여름에는 땀을 흡수하여 시원하고 겨울에는 한기를 막아주는 보온성이 있어 좋으며 방이나 대청 마루에 깔아 사용한다.

화문석의 역사
우리나라의 화문석의 역사는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의 발전과정으로 살펴 볼때에 매우 오래되었다. 인류는 본래 동굴생활이나 지하 땅굴생활을 하였으므로 흙바닥에 까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생각나는 것이 나무껍질이거나 대로 엮은 대발이나 싸리로 엮은 싸리발 등이었다. 그러나 차츰 부드럽고 보기가 좋은 완초나 갈대 등으로 바꾸어 깔았을 것이다.
화문석은 이러한 원시인들의 생활에서 차츰 발달하여 완초공예가 시작되어 인류의 문화인 석기 문화와 함깨 발달하였다.
이러한 완초문화는 시대가 발달하면서부터 인류의 기술이 발달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초경식물이나 곡물, 식물문화가 차츰 이루어져 마침내는 현재에 이르는 수준높은 현대문화가 이루어 진 것이다.
화문석에 대한 기록은 매우 많다. 우선 삼국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직관에 석전으로 불리던 부서가 있었는데 석전은 돗자리를 만드는 부서였다. 그 후 경덕왕때는 봉좌국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다기 석전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같은 책에 육두품 이하의 벼슬아치도 수레앞에 휘장을 할수 있었는데 가마앞에 완석을 느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완석은 화문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완석은 널리 알려서 외국에까지 인삼과 더불어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고려초에 요나라에 보내는 특산품 중에는 용무늬를 한 화문석인용수초지석이 들어 있었으며 송나라 사람들도 고려의 화문석을 매우 귀중하게 소장하였다고 한다.
북송시대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은 고려도경에서”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데, 매우 부드러워 접거나 굽혀도 상하지 않는다. 검고 흰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 테가 둘렸다. 더구나 침상에 까는 자리는 매우 우수하여 놀랍기만 하다”라고 극구 찬양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문석은 전국적으로 그 수요가 늘어 외국인의 애호품이 되었는데 통문관지에 의하면 중국에 동지사가 한번갈 때 화문석을 무려 124장이나 가지고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손님에게도 많은 양을 선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30년 세종12년에 돗자리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 내용은 꽃자리의 종류로 만화석, 만화방석, 염석, 화와석, 채화석 등이 있다.
또 해동역사 교빙지에 중종 26년(1531)년에 중국의 황제에게 바친 석류중에 용문염석이 20개 황화석20개, 만화방석20개 잡채화석이 20개나 되었다. 여기서 방석이란 화문석을 작게 만들어 깔고 앉는 작은 방석을 말한다. 조선왕조시대에는 꽃자리 이외에 다른 화문석을 만드는 지방으로는 영남지방의 예안, 안동지방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왕골을 짜서 거래를 하였다. 이러한 화문석을 취급하는 기관은 장흥고였으며 이곳에서는 각 지방으로부터 필요한 수량을 거두어 들였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우수한 특산품이어서 왕실에서 사용하였거나 중국에 보내는 진상품으로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강화도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루지역으로 습기가 많고 갯벌이 많아서 왕골이 잘 자란다. 강화도의 왕골은 길이가 길고 부드러워서 돛자리나 화문석을 짜는 원료로서는 전국에서 제일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왕골공예가 더 발달하여 1919년에는 보통학교 어린이들에게 왕골을 짜는 기술을 가르키기 위하여 기술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염색하는 기술과 문양을 놓는 방법을 교육시켰다.
한편 1937년에는 왕골, 슬리퍼, 핸드백, 바스켓, 화문석 등이 일보니장을 발판으로 해외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8.15광복 이후 왕골 공예는 더욱 활발하여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수요의 급증으로 odtks이 고조되기 시작하자 생산자 및 정부의 노력으로 왕골공예품 장려정책을 펴 국내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에까지 확대 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회변천에 의한 생활환경 조건의 고도화와 화학수지제품 즉 비닐장판, 비닐돗자리 등의 범람으로 왕골제품은 비닐제품의 수요에 밀려나 1980년부터 수출이나 국내수요가 점차 위축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재기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각부문의 전승공예의 부활추세에 힘입어 약간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용구
용구로는 자리틀ㆍ고드레ㆍ칼(창칼)ㆍ자가 쓰인다. 고드레는 실을 감는 쇠붙이로 크기와 무게는 자리 크기에 따라 다르나 한 개의 무게는 대략 30g 정도이며 길이 2cm 지름 2.5cm 정도이다. 6자 화문석 틀이면 216개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염색
  • 염색의 기본색으로 적색은 꽃분홍에 노랑을 친다.
  • 청색은 파랑에 노랑을 친다.
  • 자적색은 자주색 그대로 들인다.
  • 황색은 노량색에 분홍을 곁들인다. 남색은 남물에 들인다.
  • 흑색은 자주에 분홍을 곁들인다.
  • 백색은 빽빽이풀(마령초)을 건조시킨 다음 이슬에 맞혀 바래면 백색이 된다.
  • 염색된 왕골은 음지에서 말린다.

엮기법
엮기법은 원형·4각·6각·장방형엮기·무늬엮기·3올치기 등과 자리를 엮기 위한 고드래걸치기·휘갑치기 등의 과정이 있으며, 크게 노경엮기법〔露經疎織法〕과 은경엮기법〔隱經密織法〕으로 나눌 수 있다.
  • 완초화문석은 염색한 완초(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렛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 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 나가는 것이다.
  • 노경소직에 사용되는 문양은 기하적 문양과 회화적인 문양, 문자문양이 있다. 기하학문양은 완자문양ㆍ떡살문양이 많이 사용되는데 화문석의 가장자리에 표현되는 문양이다. 회화적인 문양은 봉황문ㆍ쌍학문ㆍ원앙문ㆍ장미문ㆍ오리문ㆍ십장생문ㆍ연꽃문ㆍ경회루문ㆍ야자수문 등이 있는데 화문석의 중앙에 많이 사용된다.
  • 문자문양은 그 종류가 매우 많은데 대개 길상(吉相) 문자로 수복(壽福)ㆍ부귀(富貴)ㆍ수복강녕(壽福康寧)ㆍ부귀다남(富貴多男)ㆍ쌍희(雙囍)자문 등이 있다.
  • 은경밀직에 사용되는 문양 또한 기하학문양과 회화적인 문양, 문자문양이 있다.
    기하학문양에는 완자문양ㆍ떡살문양ㆍ기(己)자문양ㆍ색동문양ㆍ거북등문양 등이 있다.
    회화적인 문양에는 이리문ㆍ신부신랑문ㆍ장고문ㆍ광대문ㆍ꽃문ㆍ태극문ㆍ가마문ㆍ꾀꼬리문ㆍ원앙문ㆍ십장생문ㆍ연못문 등 다양하다.
    문자문양은 수복(壽福)문ㆍ부귀문ㆍ쌍희자문ㆍ태극문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구상에 따라 여러 가지 문양을 설계하여 표현할 수 있다.


 
떡살문 화문석 희자화문 화문석